둘째 날이었다. 당일로 가보려 했던 곳을 다녀야 여유롭게 다닐 수 있었기에, 계획을 짜보기로 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예전에 가봤던 이름 모를 오름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언뜻 기억나는 곳은 산굼부리, 그리고, 추억으로 남아 있는 민속촌 이었다.
그 외에도 기억 나는 곳은 한림공원, 도깨비 도로, 천재연 폭포, 천지연 폭포, 정방폭포, 성산 일출봉, 산방산, 용머리 해안 등 여러 곳이 있었다. 그 중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곳은 한림공원 나머지는 걷느라 고생했던 기억만 있는 것 같다. 일단 위에 언급했던 곳은 과감하게 목록에서 제외하였다. 이날 계획은 호텔에서 나와 한라산 중턱에 있는 마방목지를 경유하고 제주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1112번 도로에 위치한 삼나무길을 거쳐 철새로 유명한 하도리 철새 도래지에서 철새를 관찰한 다음 올인하우스가 위치한 섭지코지를 둘러보고 시간이 허락하면 제주 민속촌에 들렸다가 중문단지 내에 주상절리대를 마지막으로 하루 여정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호텔에서 출발하여 마방목지로 향했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다. 네비게이션으로 20분 거리. 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것 같다. 한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마방목지는 제주 종마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 들었다. 넓은 초원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들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5.16 도로 인 것으로 기억한다. 도로 좌측과 우측 편으로 넓은 초원이 나오고 말이 한가로이 노닐고 있다. 물론 말을 관리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대부분의 말들은 벌판을 뛰어 다니거나 여유로이 풀을 뜯고 있다. 마방목지는 말 외에는 달리 구경할 게 없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인 삼나무 길로 향했다. 삼나무 길 역시 마방목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서귀포 방향으로 한 참을 달리다 보면 삼나무길 이정표가 나타난다. 이 도로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로 유명하다고 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높이 뻗은 삼나무가 인상적이다. 마치 담양의 메타세콰이어 길과 흡사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삼나무가 메타세콰이어보단 좀 더 단단하고 촘촘히 들어서 있는 느낌이었다.
이 곳 역시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에 간단히 주차할 수 있는 공간만 있을 뿐, 휴게소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인적도 드물고 차도 없는 한적한 길가에서 주변 경치를 살피며 잠시나마 여유를 즐겼다.
다음 목적지는 산굼부리. 산굼부리 역시 오름 중 하나이다. 기생화산 중 하나이다. 다만 다른 오름은 용암과 화산회가 쌓여 만들어졌지만, 산굼부리는 용암이 분출하며 생긴 구멍화산의 일종이다. 이 분화구에는 낙엽이 지는 활엽수와 낙엽이 지지 않는 활엽수가 공존한다고 한다. 또한, 다양한 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 종류만도 400여 가지가 넘어 자연 생태 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분화구 안 해가 비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식물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공존하고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 263 호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중요한 자연 유산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의 억새 역시 장관을 이룬다. 산굼부리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 주변의 억새는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물론 15년 전 내가 왔을때도 그랬지만, 수학여행이 한창인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사진을 찍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와 달랐던 것은 학생 들의 나이가 어려졌다는 것... 여고에서 수학여행을 온 듯 했다. 여학생 들의 웃음소리와 옹기 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 옛생각이 잠시 스쳐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했다.
산굼부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제주도의 묘지 문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 육지의 묘와는 달리 낮은 봉우리에 주변을 현무암으로 둘러싼 독특한 묘지 형태를 띄고 있다. 아마도 바람의 특성에 묘지 문화가 그렇게 발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다만, 누구의 묘지인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정말 넓게 펼쳐진 정원 같은 곳에 묘지가 있는데,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본다면 정말 특색있는 곳이라 하겠다. 입구는 역시 통나무 세 개로 들어 갈 수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고 있다.
문득 발견한 것은 이름모를 들꽃. 노란색의 민들레과 식물인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군데 군데 피어 있는데, 돌 사이 자라난 한송이 들꽃이 나를 반겨 주는 듯 했다. 또한 철모르고 핀 철쭉 한송이가 자신의 외로움을 하소연 하는 듯 눈에 잘 띄는 위치에 피어 있었다. 꽃을 보고 있자하니 옛 모 증권회사의 광고 카피라이트가 생각났다. "남들이 다 No라고 할때 Yes라고 대답할 수 있는..." 갑자기 떠오르는 단어... 군중속의 외로움.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지 않은 듯 활짝 피어 있지만, 보는 나로서는 측은지심만 들었다.
어느덧 오전의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산굼부리를 빠져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문득 예전의 추억을 되더듬어 보려는 곳이 산굼부리가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물론 산굼부리를 가봤던 것은 기억이 나지만, 기억을 되살리고자 했던 곳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면서 그냥 이 곳에 그 추억을 묻어두기로 했다.